예전에 쓴 글과 그림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잠시 !

유쌤9792 2009. 1. 16. 07:04

 

★그림설명; 캔트지에 수채화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

<돌 한 개 던져 올리시구려.?>

하얀 장대 끝을 지키던 새가 몸을 숨겼다.
우리 보고 장대 끝에 앉으라 한다.

저 가느다란 장대 끝에 앉으려면 마음에 찬 욕심부터
다 버려야 내 몸이 새처럼 가벼워지겠지.

다 버렸는가 하며 돌아보니 늘 가장 큰 것을 남겨 두기에
비워 낸 자리에 더 큰 웅덩이가 남는 것 같다.


< 想失. 상실>

비 오는 주말
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삼선동엘 갔다.

요즘 무엇을 먹든 속은 받아들려 주질 못하고
울컥울컥 역류한다.
아주 쓰디쓴 기억들이 올라오 듯하다.

그 기억에 살포시 가벼운 이불을 덮어주고 싶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풍경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와 가슴을 쥐어짜고 짜 탕약을 짜 내 듯 기억을 더듬어도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조차도 모르게 변했다.

 <상실.>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공 들여 찍은 필림으로 순간 빛이 들어 간 황망한 느낌에.
내가 태어 난 집 입구에 서서 한참을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내 기억엔 고스란히 남아 있는 풍경들이 다 어디로 숨은 걸까?
나와 술래잡기를 하자는 것일까.?

내 어릴 적 개천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국어 받아쓰기시험에 많이 틀려 엄마에게 혼이 났어도

이곳에 와 앉으면 기분이 좋아졌고.
빨래하는 어른들이 내 보내는 비눗물에서 물방울 놀이하다가

고무신을 잃어버려도 좋았다.
여름이면 개천으로 떠내려 오는 온갖 쓰레기를

잠자리채에 모아 들이는 것도 즐거웠다.

개천 주변엔 성암 교회가 있었고 개천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개천 축대 밑으로는 덩네를 위한 빨래터가 있었다.

지금은 그 널따랗고 시원하던 개천을 덮어 유료 주차장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때만이라도 찾아 갔던 성암 교회는 어디로 간 것이야.?
그래도 일 년에 두 번은(크리스마스와 부활절)정성스럽게 다니 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교회인데 그 교회는 하늘로 문을 낸 것일까?

<신안 탕.> 우리 동네에 있었던 아주 오래 된 목욕탕.

신안 탕에서 나오는 더운 물이 내가 놀던 개천으로 흘러 내려 왔었다.
(그러나 그 물이 더러운 물이라는 것을 커서야 알았다)


개천에서 신나게 놀다가는 <신의 축복>으로 넘쳐 나오는 더운 물이라며
친구들과 나는 서로 먼저 씻겠다고 다투면서 그 더운 물에 몸을 씻었는데....
그 더운 물이 더러운 물이면 어떻고, 깨끗했던 물이면 어떤가.
지나가고 나면 그도 다 아름다운 추억의 한 부분으로 예쁘기만 한 것을,

<돈암동 성당>
대학 3학년 때 이곳 돈암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머리 조아리고 가슴을 땅에 닿게 하고는

말도 안 되는 바램을 더 많이 기도하던 성모상도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을 만치 낡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붉은 벽돌이 고풍스러워 멀리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던 그 성당 건물도 너무나 오래 되

더 이상 버틸 수 없기에 허물고 다시 지었단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억지 바램 기도를 너무 많이 읊조린 탓일까!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내가 알아 볼 흔적 한 개쯤은 남겨나 두시지!


< 경동고등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눈이 오면 대나무살 발 스키와 양회 봉지를 엉덩이에 깔고

눈썰매를 타던 곳.

 길고 가파르게 보였던 길이 어쩜 저렇게 낮고 펑퍼짐한지...
내 눈을 의심했다.

어릴 적 내 눈과 마음이 모두 허풍이었나..?

<삼선동 5가의 골목길>

어릴 적엔 저 골목길이 너무나 길었다.

 

겨울이면 어른들 몰래 물을 내다 버려 빙판을 만들 던 곳이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가 늦으면 아버지가 늘 나와서 서 계시던 곳이기도하다.

기다리려야 하는 딸도 이제는 없고,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도 안 계시다.

<동네 방앗간>
한길가의 일본식 집은 그대로다.
잉크 집과 텔레콤엔 방앗간 일각문이 있었고,

방앗간에서는 일 년 내내
피대 돌아가는 소리로 귀가 멍멍했다.
겨울이 가깝게 닥아 오면 고춧가루 찧는 소리로

밤늦게까지 양철 통 두드리는 소리로 귀가 멍멍 했다.

그래도 고사떡 찔 쌀을 찧으러 가는 날은
혹시나 붉은 고춧가루가 흰 쌀에 섞일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그것을 보느라고 눈이 빠져나갈듯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사라져버린 우리집>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저런 콘크리트의 건물이...
(진작에 내가 저 집을 샀어야 하는 건데 얼마 되지도 않을 돈일 텐데
엄마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있던 집이며, 내 어릴 적 꿈이 그대로 담겨 진
삼선동 5가 252번지인 바로 그 집인데.>

흔적 없이 사라진 집터에 올라선 새로운 집의 골조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저 건물을 쳐다보면서 한참을 넋이 나갔다.
그리곤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그 무엇인가에 눈물이 났다.


<우리 옆집>
커다란 개가 늘 골목을 서성이던 김 재철 씨 집.

나와 개는 늘 앙숙이었다.
<예전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철문 대문이었던

집이 지금은 유치한 초록의 유리문이라니.>

내 어릴 적엔 할머니집의 대문이 열려 있던 적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과 눈길도 말도 섞기를 꺼려하시던 할머니.

학교 갔다가 돌아오던 겨울 저녁의 어느 날 .
할머니 집 대문이 열려있었고

할머니 집 대문에 <謹弔>란 붉은 등이 무섭게 걸려있었다.

할머니 집 앞에 내 발이 그 자리에 붙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얼마나 두려웠던지 열린 대문을 보니 아직도 그 기분이 느껴졌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잠시 추억을 찾아 더듬어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