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딱 내눈에 보이는 곳 뿐인 듯하다.
달리던 차가 멈추고
멈추어서 되 돌아 온 길을 차창 밖의 밀러로 볼 때
왜 그렇게 낯 설고 , 왜 그렇게 눈물이 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해내림을 소리 없이 받아 들이고 있는 시각에
도로 한 복판에 서서 차창 밖의 밀러로 노을을 바라 보는 일은
묵혀 두었던 그림움에 분탕질을 하는 격이다.
어둠은 참으로 겸손하다.
양지든, 음지든, 그 어느곳에도 편애를 두지 않은채
아주 서서히 느린 동작으로 세상에 검은 먹칠을 한다.
우리도 저렇게 서서히 자신의 삶을 소리없이 자연스럽게
내 주어야 하는 때를 기다리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시험엔 그 어떤 정답도 오답도 없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도하고, 미워도 하고, 그리워도 하는 것인데
입으로는 버리고 또 버려야 몸도 마음도 가벼운 새의 날개 깃처럼
가벼워 어디로든 마음을 흔들고 다닐 수 있건만.
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날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격이다.
세월의 시간은 저렇게 어김없이
밝음과 어둠은 미련 두지 않고 잘도 버리는데
너무나 우울하여 울고 싶은 날의 연속이다.
어제는 하루종일 염주알을 돌리고 또 돌려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 졌다.
엿 가락처럼 늘어지던 휴일 오후 내 가슴을 친 전화 한 통.
<유선생! 소식 들으셨나요. 박선생님이 돌아 가셨답니다.>
꿍 수화기 접는 소리가 가슴에 천둥소리로 남다.
지난 2년간 출근시 종종 버스를 함께 타고, 퇴근시 내 차로 퇴근을.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두런두런 정스럽게 나눈 우리인데
정년을 아름답게 , 멋지게 맞이하기 위해 아이들과 운동장 달리기도
마다하지 않으시던 분. 이이들 일이라면 밤 낮을 가리지 않던 분.
꼭 나와 동학년을 한 번 해야 겠노라며 내 자리에 길을 내어 주시던 분.
작년 4월 중순 쯤.
봄 수련회 때 아이들을 데리고 문경엘 갔었다.
그 날도 속이 약간 거북하시다며 소식을 하시기에 걱정이 되었다,
내 딴엔 친절하게도 그리고 더 오래 멋진 삶을 위해
우리 집안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건강검진 예약을 해 드렸다.
수련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온 후 검진을 다녀 오시던 길에
내게 전화를 주셨다.
<유 선생 검진 결과가 나쁘네. 위암이 많이 진행 되었다는군
그것 참 수술을 하라면 하지 뭐 ! 걱정 마!>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는 병가. 퇴직, 항암치료, 그리고 두 번의 대 수술.
병원에 계시면서도 학교 걱정으로 아이들을 잘 부탁 한다고 하셨고,
나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고마우이 유선생! 당신 아니면 더 큰일이 날 뻔 했는데> 하셨다.
1월 중순께 병원에서 나오셨다며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다.
<나 이제 먹기도 잘 먹고 체중도 좀 늘고 그랬다오
아이들 학기는 잘 마쳤나? 녀석들이 보고 싶구만 유선생도 건강 조심해>
우리는 봄에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예전처럼 만나기로 했다.
높다란 육교의 계단을 휘이휘이 바람처럼 걸어 내려 오시던
박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좋아지라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병원 검진도 권했고, 수술도 했는데
<육십일세>란 나이가 너무 아깝고 원통하다.
그럴 줄 알았다면 고생고생 안 하시고 그냥 살다가 떠나시게 하는건데.
학교에서 교사들 모두들 문상을 간다고 모였다.
난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난 울었다.
우리에겐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만 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삶에 묶인 끈이 휘청이는 순간이다.
박선생님은 지금 어디쯤 가셨을까!
저 노을의 뒤일까 더 멀리 아니면 저 바다의 끝에 서 계실까!
나 눈물이 자꾸 많아진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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