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주의 논란
고구려, 그것도 고조선 이후 가장 영토를 많이 넓혔다는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삼은 것은 민족주의적 열망을 고취하는 것 아닌가 하는 주장이 촉발됐다. 민족주의 마케팅, 민족주의 상업화, 과도한 영웅주의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태왕사신기는 연개소문, 대조영, 주몽에 이은 고구려 흥행물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비판이다. 이런 시각으로 태왕사신기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참지 못했다는 사람도 나왔다.
태왕사신기 한편만 놓고 보면 단순한 오락물이다. 이 드라마가 역사의 무게를 엄중히 여긴다는 징후는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 환타지를 만들기 위해선 신화적인 공간이 필요한데 조선시대는 이미 충분히 구조화돼 있고, 워낙 선비들의 나라라서 활달한 공간이 없으므로 만주벌판 고구려 초기로 돌아가는 건 당연해 보인다.
앞으로 무협 환타지의 배경으로 이 시기가 차출되는 일이 흔할 것 같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면 상상력이 이미 제한되지 않는가. 일본이 대규모 무협사극을 만들기 위해 전국시대를 호출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왜 갑자기 고구려 시대극이 봇물을 이루냐는 것이다. 이미 조선 등은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데다가, 고려까지 왕건, 제국의 아침, 신돈 등으로 한번 썼으므로 그 이전까지 올라가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사 열풍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고, 그후에 고구려 사극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을 보면 민족주의가 없다고 할 수만은 없다.
태왕사신기를 민족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과도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 민족주의적 열풍은 조금만 방심하면 도를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태왕사신기를 보면서 불편해할 정도까지의 위험성은 없다.
2. 역사왜곡 논란
이건 좀 황당하다. 왕과나처럼 정통사극을 표방하면서 역사를 이리저리 비트는 경우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이산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는데, 이산은 실제역사를 배경으로 한 측면이 더욱 강하므로 잘못 그릴 경우 역사왜곡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태왕사신기는 드러내놓고 환타지로 만드는 오락물이다. 이런 것에까지 역사왜곡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환타지 장르를 아예 없애자는 말인가? 한 민간단체는 태왕사신기 방영금지를 촉구하며 MBC 앞에서 집회까지 열었다고 한다. 과민한 반응이다.
3. 중국·일본 눈치 보기 논란
이것은 앞서 언급한 1번 논란과 2번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태왕사신기가 민족주의 열풍을 고취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식의 정념이 방영금지요구 집회로까지 나타났다. 네티즌들도 태왕사신기의 광개토대왕 업적 축소 움직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드라마 팔아먹으려고 중국·일본 눈치 보느냐’라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건 이 세상에 없다. 국민도 없었다. 그냥 사람만 있을 뿐이다. 국민을 만든 건 근대국가다. 민족을 만든 건 ‘기억’이다.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이 같은 민족이 된다. 기억에 개입해 새로운 민족을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살던 터전, 즉 영토를 얻는 방식이기도 하다.
동북아는 ‘기억’의 전장이다. 수십 년 전에는 일본이 이를 도발했었고, 지금은 중국이 도발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만주에서 활동하며 왜구와도 싸웠으니 이 두 개의 ‘기억’과 다 만난다. ‘우리도 저들의 도발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을 사수하자’는 입장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태왕사신기는 수백억을 들인 대작으로 처음부터 다른 나라에 팔 것까지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심형래가 팔 나라의 언어를 썼듯이, 김종학도 팔 나라의 기억과 드러내놓고 충돌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류 팔아먹으려고 우리 역사 축소했다’는 주장은 맞기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쁜 일인가? 팔린다는 건 그 쪽에서 용인한다는 의미다. 안 팔리면 용인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지금 아쉬운 처지다. 중국와 일본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통일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태왕사신기가 중국과 일본에서 팔리는 선에서 내용을 절충한 것은 드라마 마케팅 이외의 이유로도 정당하다.
서독의 통일전략, 팽창전략은 끊임없는 사과와 몸 낮추기였다. 서독이 틈만 나면 ‘우리가 통일만 하면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옛날 영토 회복할 거야’ 이러고 다녔다고 생각해보라. 절대로 통일 못했다. 주변국에게 철저한 신뢰를 줬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을 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유럽의 지도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거다.
기억 전쟁은 사실상의 영토 전쟁인데 한국이 압록강, 두만강 너머의 기억을 중국·일본을 대상으로 한 대중오락물에서까지 확고히 하려고 하면 주변국이 결코 좌시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경계를 부르고, 주변국은 한국의 준동을 눈에 불을 키고 견제할 것이다.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주변국 눈치 보는 건 당연한 거다. 왜? 우리가 지금 눈치 봐야 할 궁색한 처지니까. 태왕사신기같은 동아시아 전체를 겨냥한 드라마는 우리도 그냥 단순한 환타지 오락물로 치부하고, 중국·일본도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해주는 것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도, 김종학 프러덕션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과하지 말자.
'미적체험하기 > 알아서 좋은 것들--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 인기사이트 모음집 (0) | 2007.11.27 |
---|---|
<펌>교황 닮은 불꽃? 요한 바오로 2세 형상 불꽃 화제 (0) | 2007.11.10 |
[스크랩] 카드지갑 만들기 (0) | 2007.09.18 |
[스크랩] 석굴암 1913년 유리원판 사진 공개 (0) | 2007.09.17 |
[스크랩] 소세지 하나만 있으면..... (0) | 2007.09.17 |